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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뱅이수집가[취미, 일상]

제주 4·3 다크투어 : 증언과 흔적으로 걷는 기억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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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서문: 제주 4·3, 기억을 걷는 길
  • 제1부: 제주 4·3항쟁, 비극의 서막
    • 1.1 시대적 배경: 해방 직후의 혼란과 제주
    • 1.2 항쟁의 발발과 전개: 무장봉기에서 초토화 작전까지
    • 1.3 4·3 사건의 특징과 역사적 의의
  • 제2부: 중산간에 지워진 마을, 동광리의 비극
    • 2.1 무등이왓: 평화로운 삶터의 파괴
    • 2.2 삼밭구석: 임씨 집성촌의 사라진 흔적
    • 2.3 큰넓궤: 생존을 위한 처절한 은신처
    • 2.4 시신 없는 무덤들: 임문숙 가족 헛묘와 김여수 가족 헛묘
  • 제3부: 대정읍, 남은 상흔과 끝나지 않은 진실
    • 3.1 일제강점기 유적: 송악산 진지동굴과 알뜨르 비행장
    • 3.2 섯알오름 탄약고 학살지: 한국전쟁과 예비검속의 비극
    • 3.3 백조일손지묘: 뒤엉킨 죽음, 하나 된 넋
  • 제4부: 정방폭포, 마지막 학살의 현장
  • 결론: 끝나지 않은 역사,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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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제주 4·3, 기억을 걷는 길 🚶‍♀️

제주 4·3항쟁의 아픈 역사를 세상에 알리고, 무고하게 희생된 도민들의 넋을 기리며, 그 4·3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이 자료집을 마련했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을 넘어, 당시 살아남은 이들의 처절한 증언고통,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인간 존엄의 의미를 함께 전하고자 합니다.

4·3의 기억을 따라 걷는 이 길은 슬픔과 분노로 얼룩져 있지만, 진실을 밝히고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가기 위한 희망의 길이기도 합니다.

제주 4·3은 결코 과거에 머무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절규와 한(恨)'으로 얼룩진 이 역사를 직시하는 일은 곧 현재의 우리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미래의 비극을 막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에서 시작되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 해제까지 7년 7개월 동안 이어진 비극입니다. 해방 후 혼란과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로당 무장대의 봉기와 이를 진압하는 토벌대의 폭력 과정에서 수만 명의 제주 주민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는 현대 한국사에서 한국전쟁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민간인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실제로 당시 제주 인구의 약 10%에 해당하는 최대 3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300개에 달하는 마을이 불타 없어졌으며, 수만 호의 가옥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렇듯 제주 섬 전체가 피로 물든 4·3의 참상은, 그 규모와 잔혹함 면에서 한 국가의 학살사에 뼈아픈 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1부: 제주 4·3항쟁, 비극의 서막 🌄

1.1 시대적 배경: 해방 직후의 혼란과 제주 🌪️

광복 직후 한반도는 미·소 냉전의 최전선이 되었습니다. 남쪽에서는 미군정이 통치하며 1948년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고, 북쪽에는 소련의 영향 아래 별도의 정부 수립 움직임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분단 기도에 제주도민들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실제로 1947년 3월 미군정 정보보고서는 제주도 주민의 70%가 좌익 성향이거나 동조자로 보인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제주 사회에는 분단과 외세 지배에 대한 거부감과 자주 통일에 대한 열망이 컸습니다.

미군정은 제주가 공산주의 세력의 온상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제주도민의 불만이 표출되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기보다는 강경한 진압을 통한 질서 확보에 집착하게 됩니다. 당시 제주 사회는 일찍이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꾸려져 비교적 자치적으로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미군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경찰력을 앞세워 해체를 시도했습니다. 특히 제주로 부임한 경찰과 관료들 중에는 일제강점기 때 친일 경력자들이 많았고, 이들이 주축이 된 경찰은 주민들을 강압적으로 다루었습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열린 기념식 중 경찰의 발포로 어린이를 포함한 주민 6명이 현장에서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분노한 도민들은 가해 경찰의 처벌을 요구하며 총파업과 시위를 벌였지만, 경찰은 오히려 수백 명을 검속하고 구타·고문을 일삼았습니다. 심지어 서북청년회 등 극우 단체들까지 제주에 투입되어 횡포를 부리며 민심을 자극했습니다.

“육지에서 내려온 응원경찰들은 취조를 매질로 시작했다”는 증언이 나올 정도로, 외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폭력은 제주도민을 극한의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러한 억압은 제주를 ‘빨갱이 섬’으로 낙인찍었고, 국가공권력은 제주 주민 전체를 적으로 취급하는 논리를 강화해갔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제주 사회는 활로가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제주 경제는 일본 본토의 수탈과 식민지 경제체제에 편입되면서 전통 산업 기반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도내 공장은 가동을 멈추고 실업자가 쏟아졌으며, 미곡 수집 정책의 실패로 농민들은 더욱 困窮(곤궁)했습니다. 1946년 여름에는 큰 흉년과 함께 콜레라까지 번져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 등, 제주도민의 생존 환경은 빈사 상태였습니다. 식량과 생필품은 턱없이 부족했고, 물가는 폭등했으며, 암시장까지 횡행하여 민심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이런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제주도민 수만 명이 좌익 계열인 남로당에 동조하거나 가입했습니다. 이념이라기보다 살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실제로 제주도민 약 6~7만 명이 남로당에 가입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의 수탈과 광복 직후의 혼란, 그리고 현실의 가난에 시달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제주 사회의 불만은 임계점에 달해 있었고, 분노와 좌절이 응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4·3은 단순한 이념 대립을 넘어서 민중의 생존권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경찰과 극우단체 폭력으로 제주 공동체가 붕괴 직전에 놓여 있었습니다.

경찰은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사람을 가차 없이 검속했고,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무장대나 산으로 숨은 이들의 가족까지 죄인 취급했습니다. 남편이나 아들이 숨어들거나 행방불명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내와 어머니들이 연행되어 고문당하고 총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러한 연좌제식 탄압은 무장대와 직접 관련 없는 노인, 여성, 어린아이들까지 마을에서 끌어내 죽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국가 공권력이 가족 관계를 이유로 삼아 한 집안을 몰살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살육을 피해 살아남은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등지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수많은 제주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부산 영도로 피난길에 올랐고, 제주 출신 해녀들이 부산 앞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제주은행 부산지점이 생기는 등, 제주 외지 이주와 디아스포라까지 초래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제주도 전체가 지옥같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던 것이 4·3 발발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1.2 항쟁의 발발과 전개: 무장봉기에서 초토화 작전까지 ⚔️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마침내 제주섬 곳곳에서 총성과 함께 봉화가 타올랐습니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약 350명의 무장대가 한라산 중산간 일대 오름마다 봉화를 올리며 신호를 주고받았고, 동시에 도내 12개의 경찰지서와 우익 단체 간부들의 집을 급습했습니다. 이들은 소총 등 화기를 가진 비율이 10%도 되지 않았고, 대부분 화승총, 낫, 일본군 출신들이 숨겨놓았던 일본식도나 마을 대장간에서 만든 창 등으로 무장한 열악한 상태였습니다.

봉기의 직접적인 목적은 5·10 단독총선거를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주도민 대다수는 미군정이 주도하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고, 5월 10일 예정된 총선거를 보이콧했습니다. 실제로 5·10선거에서 제주도 2개 선거구는 투표 자체가 무산되어 전국에서 유일하게 국회의원을 뽑지 못한 지역이 되었습니다. 제주인의 저항이 그만큼 완강했던 것입니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권은 제주 사태를 새로운 국가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습니다. 본토에서 군 병력이 추가 파견되고 토벌대의 규모와 무장은 강화되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제주에서는 여전히 무장 봉기 세력이 활동 중이었고 치안은 악화일로였습니다. 그러자 이승만 정부는 같은 해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른바 “초토화 작전”을 발동합니다. 계엄령 포고문에는 "해안선으로부터 5km 밖 지역에서 발견되는 사람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조리 사살하라"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명령은 사실상 중산간 지역 주민 모두를 적으로 간주해 쏘면 쏘는 대로, 보이면 보이는 대로 죽이라는 것이었고, 그 결과 말 그대로 제주섬은 불타고 짓밟히는 초토(焦土)가 되었습니다.

‘초토화 작전’의 잔혹성은 4·3 비극의 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전 개시 이후 군·경 토벌대는 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보이면 사살하거나 불태웠습니다. 가축마저 몰살시켜 생존 기반을 없애버렸고, 마을 우물에 시신을 유기하거나 독극물을 풀어버렸다는 증언까지 전해집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작전이 미군정과 주한미군 고문단에도 보고되고 승인되었다는 점입니다.

제주4·3평화재단이 최근 입수한 3만8천 매 분량의 미국 국립문서 기록에 따르면, 주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1949년 1월 제주 작전과 관련해 채병덕 당시 국방부 참모총장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이 초토화 계획을 “최고 수준의 사고(Excellent Top-Level Thinking)”라고 극찬했습니다.

로버츠는 제주에 추가 병력을 투입해 공산주의자를 소탕(cleaning-up)한다는 한국군의 계획을 보고받고 이를 높이 평가했을 뿐 아니라, 한국 국방부가 작전 계획과 전략을 미군 고문단과 항상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특히 치하했습니다.

이 문서는 당시 대한민국 군대의 작전 통제권이 미군에게 있었던 시기에 이러한 학살 작전이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며, 제주 4·3 학살에 대한 미국 측의 직·간접 책임을 묻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됩니다.

실제로 미군 정보보고에도 “1949년 2월 20일 제주에서 민보단 등이 주민 76명을 창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을 한국 고위 당국자들에게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경찰과 우익 청년단의 잔혹 행위에 대해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취한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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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미국이 제주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인지하고도 묵인하거나 조장했음을 시사합니다.

미군정은 자유진영의 최전선인 한반도 남부에 친미 정권을 세우는 데 제주도의 저항이 장애물이 될까 두려워, 사건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주도민들을 공산 반란세력으로 몰아붙여, 가능한 빨리 섬을 피로 잠재우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극단적 진압은 도민들의 극렬한 항거심을 더욱 자극했습니다.

제주 주둔 군 부대장이었던 김익렬 중령은 훗날 “경찰이 1948년 11월 비밀리에 감행한 극단적인 초토화 작전 때문에 오히려 평범한 주민들까지 대거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초토화 명령으로 삶의 터전을 불태워버리자,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주민들이 산중으로 피신하거나 일부는 봉기 세력에 투항함으로써 항쟁의 불길은 오히려 더 번져간 것입니다. 국가 폭력이 부른 더 큰 저항이라는 비극적인 악순환이 벌어진 것입니다.

1949년 3월에 이르러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고 나서는, 무차별 토벌 일변도에서 진압과 회유를 병행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선회되었습니다. 토벌대는 산간에 숨어든 주민들에게 자수를 권고하고 식량을 미끼로 내걸어 투항을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론 무장대 근거지를 집중 소탕하며, 1949년 봄부터는 무장봉기 세력이 눈에 띄게 약화되어 갔습니다. 1949년 8월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월북하고, 1949년 말까지 제주 섬 내 무장대 조직은 사실상 와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주에 드리운 비극의 먹구름은 완전히 걷히지 않았습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 번의 대규모 학살이 자행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룹니다).

그리고 한국전쟁 휴전 후인 1954년 9월 21일, 군 당국은 장장 6년 동안 일반인 출입을 금지했던 한라산 통행금지령(금족령)을 해제하였습니다.

이로써 겉으로는 7년 7개월에 걸친 제주 4·3사건이 공식 종결되었다고 선언되었지만, 도민들의 가슴에 남은 상흔과 진실 규명의 과제는 그 후로도 수십 년 간 끝나지 않았습니다.

1.3 4·3 사건의 특징과 역사적 의의 🌟

제주 4·3은 희생자 수, 피해 규모, 그리고 지속 기간 면에서 한국 현대사의 유례없는 비극입니다. 수많은 주민이 학살당했을 뿐 아니라, 그 죽음의 양상 또한 매우 다양하고 처참했습니다. 무장봉기를 진압한다는 명분 아래 자행된 경찰의 발포 사건, 계엄군의 토벌 작전 학살, 이념과 종교 차이에 따른 숙청, 특정 지역 주민을 표적삼은 초토화 학살, 가족이나 마을 단위로 벌인 보복 학살 등,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집단학살이 제주도 한 곳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만큼 제주 4·3은 이념이 빚어낸 광기와 국가 폭력의 총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겉으로는 좌·우익 대결의 산물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해방 공간의 혼란, 친일세력의 잔존, 미군정의 정책 실패, 냉전 논리에 편승한 공권력의 오만과 두려움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특히 미군정의 책임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 남쪽에 친미적인 단독 정부를 세우는 것을 최우선시했고, 제주도에서 벌어진 민심의 동요를 공산주의의 책동으로 간주했습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선거를 앞두고 “자유로운 분위기 조성”을 요구하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제주 4·3을 그런 국제사회 눈치를 살피는 데 장애가 되는 폭동쯤으로 치부해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제주 4·3의 본질적 원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제주도민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미국과 남한 정부는 냉전 논리에 따라 이 사건을 빨리 덮고 넘어가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주 4·3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것이 단순히 지역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이념을 빌미로 자행한 반인도적 범죄, 즉 자국민에 대한 집단학살의 한 형태였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국가가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행한 무차별 학살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Genocide(집단살해)에 가깝습니다.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보고서에서도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하였고, 이러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져야만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반공 이데올로기의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4·3은 더 이상 제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이데올로기 폭력의 전형으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실제로 4·3 관련 기록물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이는 4·3이 “국가 권력에 맞서 진실을 밝히고 화해와 상생을 이끌어낸 지역사회 민주주의 실천의 성과”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제주 4·3은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장이지만, 그 진실을 밝히고 아픔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인권과 평화, 화해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주는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제2부: 중산간에 지워진 마을, 동광리의 비극 🏡

2.1 무등이왓: 평화로운 삶터의 파괴 🔥

https://place.map.kakao.com/2134606029

 

잃어버린마을 무등이왓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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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무등이왓은 원래 동광리의 5개 부락 중 가장 규모가 큰 마을이었습니다. 제주 방언으로 ‘이왓’은 마을을 뜻하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마을 뒤로 굽이진 산자락(무등이오름)이 감싸 안은 작은 평원 지대였습니다. 해방 전까지 약 130여 호의 주민이 살았으며, 마을 인근에 있던 국영목장 “칠소장(七小場)”에서 말총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주변으로 대나무 숲이 우거져 주민들은 말총으로 탕건과 망건, 대나무로 차롱과 바구니 등을 만들어 생계를 이었습니다. 초가지붕을 이은 집들이 돌담을 두르고 줄지어 있었고, 돌담 위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잎들이 푸르게 넘실댔습니다. 1948년 이전까지만 해도 무등이왓의 풍경은 이처럼 평화롭고 한가로운 제주 농촌의 삶터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는 1948년 가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초토화 작전”이 한창이던 11월 15일, 무장대 토벌 작전을 마치고 내려온 군경 토벌대 병력이 동광리 일대로 들이닥쳤습니다. 무등이왓 주민 대다수는 이미 산으로 피신한 뒤였지만, 일부 주민들은 제대로 소개령(避難命令)을 전달받지 못해 마을에 남아 있었습니다.

토벌대는 남아 있던 주민들을 마을 한곳에 집결시킨 뒤, 그중 10여 명을 별도로 호명해 앞으로 불러냈습니다. 이어 그들을 향해 다짜고짜 총구를 겨누고 구타하기 시작했습니다. 총검과 곤봉, 몽둥이로 난타당한 주민들은 팔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졌습니다. 이어서 총성이 울렸고, 매맞아 쓰러진 주민 10여 명은 그 자리에서 참혹하게 총살되었습니다. 4·3 당시 제주 지역에서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이 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사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무등이왓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평화롭던 마을에 첫 총성이 울린 순간, 남은 가족들의 악몽 또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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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불과 한 달도 채 안 지난 1948년 12월 12일, 무등이왓에서는 인간의 상상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잔혹한 만행이 벌어졌습니다. 제주 4·3사에서 “잠복 학살”로 기록되는 이 사건은, 토벌대가 자신들이 앞서 죽인 주민들의 시신을 일부러 미끼로 남겨두고 벌인 계획적인 학살극이었습니다. 토벌대원들은 전날 학살당한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러 틀림없이 유족들이 내려올 것이라 예상하고 마을 주변에 숨어 잠복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김두백 씨 일가족 등 10여 명의 주민들이 사랑하는 이의 시신을 찾아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시신이 방치된 채 모여 있던 마을 공터로 그들이 들어서자, 여기저기 매복해 있던 토벌대가 일제히 나타나 총부리를 겨누었습니다. 총성과 비명이 중산간에 울려 퍼졌습니다. 토벌대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이들을 한곳에 몰아넣은 뒤, 주변에 있던 짚더미와 멍석을 끌어다가 우량우량 쌓았습니다. 이어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자 순식간에 시커먼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불붙은 짚더미 더미 아래서 사람들이 울부짖었습니다. 불길은 그 비명 소리를 집어삼키며 더욱 거세게 일었습니다. 눈앞에서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가 산 채로 화염에 휩싸여 비명 지르는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정신이 나가 버렸다고 합니다. 불길이 사그라들었을 때 그곳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숯검댕이 시신들만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죽임을 당한 이들은 거의 대부분 여성노인, 아이들이었습니다. 시신을 미끼로 유족마저 몰살한 이 만행은 단순히 인명을 살상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체가 가진 애도할 권리마저 말살하려 한 의도적인 심리전의 잔혹성을 보여줍니다.

 

 

이 학살의 참상을 직접 겪은 주민 신원숙 할머니(증언 당시 81세)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날을 증언했습니다. *"동짓날 열하루날 죽을 사람이 일곱, 열이튿날 죽을 사람이 열아홉...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죽였어. 그 어린 애기들은 (우니까) 죽창으로 찔러 죽이다가 힘드니까 보리짚을 던져 화형(火刑)시키기도 했어. 군인들이 숨어 있다가 시신 수습하러 온 사람들도 모조리 몰살시켰지.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 그녀의 말처럼 토벌대원들은 우는 어린아이를 대나무 창으로 찔러 죽이고, 더디 죽자 아예 불태워 죽이는 극악무도함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죽은 이를 거두러 온 가족까지 숨겨 있다가 덮쳐 학살한 것입니다.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는 신 할머니의 증언은, 무등이왓에서 벌어진 일이 얼마나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끔찍한 범죄였는지를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한편, 무등이왓 주민들은 자기 마을의 불행을 일제강점기의 고통과 연결해 기억하곤 합니다. 무등이왓은 일제 때 강제로 시행된 보리 공출의 피해도 컸던 지역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 마을의 4·3사건은 사실 보리공출 사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일제가 굶주린 농민들의 보리마저 수탈해가던 시절, 마을 공고판에 강제 공출을 알리는 포고문이 붙었고, 이를 거부하면 헌병의 총칼이 뒤따랐습니다. 해방이 되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아래에서 되풀이된 억압과 강탈은 이들에게 식민지 시대와 다를 바 없는 삶으로 느껴졌습니다. 무등이왓에서 들불처럼 치솟은 저항의 밑바탕에는, 그렇게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민중의 분노와 한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2.2 삼밭구석: 임씨 집성촌의 사라진 흔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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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밭구석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1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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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리 하동마을인 마전마을의 한 구석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삼(麻)을 재배하던 밭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임씨 성을 가진 사람들 46가구가 모여 살아 ‘삼밭구석’이라 불리던 작은 부락이 있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삼밭이 있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삼밭구석은 동광리 중산간 마을들이 소개령으로 마을을 비운 후 영영 복구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 중 하나입니다. 현재 그 터에는 잘 가꾸어진 밭들 사이사이에 대나무 숲이 군데군데 남아 있어, 한때 그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조용히 증언해줄 뿐입니다.

 

1948년 11월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 뒤, 삼밭구석 주민들은 목숨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일부는 인근 큰넓궤 같은 동굴로 몸을 숨겼고, 다른 이들은 중문이나 모슬포 등의 해변가 마을 친척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토벌대의 수색망을 끝까지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중산간 주민들을 숨겨주던 큰넓궤 동굴이 발각되고 이어 피신한 사람들에 대한 색출 작전이 강화되면서, 붙잡힌 주민들은 서귀포의 일본인 세탁공장을 개조한 ‘서귀포 단추공장’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949년 1월 20일경, 토벌대는 수용된 주민들을 트럭에 실어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으로 끌고 갔습니다. 거기서 눈 가린 주민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총살한 뒤, 시신을 바다로 던져버렸습니다. 이렇게 희생된 삼밭구석 출신 주민이 약 50여 명에 이릅니다. 특히 임씨 집성촌이었던 이 마을에서는, 임문숙 씨 일가족 5명을 포함해 14명의 임씨 일가가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 집안이 통째로 풍비박산난 것입니다.

삼밭구석의 비극은 그 자체로도 처참하지만, 오랫동안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마을이 소멸해버린 탓에 증언을 모으기도 어려웠고, 유족들은 오랜 세월 숨죽이며 한을 삭여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9년이 되어서야 살아남은 주민들이 힘을 모아 4·3사건 위령비를 세우고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넣었습니다.

그리고 2023년 8월, 삼밭구석 일대에서 수행된 4·3 유해 발굴 작업 중 당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7~10세 아이 두 구의 유해가 발견되었습니다. 70여 년의 세월을 뚫고 나온 작은 유골들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습니다. 유족들은 “드디어 아이들을 집에 데려갈 수 있게 됐다”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처럼 제주 4·3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땅속에서 신원조차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의 뼈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해 발굴은 단순한 과거 파헤치기가 아닙니다. 이는 그동안 이름 없이 잊혀질 뻔했던 희생자들의 존재를 다시금 세상에 드러내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며, 더딘 정의나마 이루어지도록 하는 소중한 과정입니다. 또한 남은 가족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일입니다. 삼밭구석의 잃어버린 마을 터에 서 있는 위령비와 새로 발굴된 어린 희생자의 유해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과연 이 비극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우리는 기억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2.3 큰넓궤: 생존을 위한 처절한 은신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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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넓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산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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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리 산 90번지 일대에 있는 큰넓궤는 용암이 흐르다 식으면서 생긴 천연 동굴로, 제주 중산간 지대에 숱하게 퍼져 있는 숨골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1948년 11월 중순 이후 이 굴은 그저 자연동굴이 아니라, 동광리 주민들에게 생과 사를 가른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어 토벌대가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사살해오자, 동광리 주민 수백 명은 살 길을 찾아 마을을 버리고 산으로 올랐습니다. 그중 약 120~250여 명은 큰넓궤로 모여들었습니다. 큰넓궤는 입구가 매우 험하지만 내부 공간이 넓어, 많은 사람이 몸을 숨기기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마을마다 흩어져 달아났던 사람들이 “큰 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한둘 모여들었고, 무등이왓 사람들, 삼밭구석 사람들 할 것 없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이 굴 속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동굴 안 생활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건 고행이었습니다. “앞이 하나도 안 보여서 억새 풀에 불을 붙여 그 불씨로 굴을 찾아 들어갔다”는 홍춘호 할머니(당시 11세)의 증언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 안을 밝힐 불빛조차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굴 입구는 성인 한 사람이 겨우 기어서 들어갈 만큼 비좁았고, 몇 미터를 기어가면 3~4미터 높이의 절벽이 나타나 아이나 노인은 혼자 내려갈 수 없었습니다. 겨우 내려선 굴 내부 바닥은 바위와 울퉁불퉁한 용암자갈 투성이어서 한 발짝 내딛기도 힘들었습니다. 굴은 안쪽으로 두 갈래로 갈라지며 위아래 두 개 층으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무등이왓에서 온 사람들이 윗굴의 평평한 공간을 차지해 움막을 치고 지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넓다 해도 동굴은 동굴이었습니다. 바깥은 초토화 작전으로 총탄과 불길이 휩쓸었지만, 동굴 안이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 한 모금, 먹을 것 한 숟갈 구하는 일이 매일같이 큰 숙제였습니다. 마실 물은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아 억새 줄기를 빨대 삼아 빨아 마셨습니다. 먹을 것은 집에서 아무것도 갖고 나오지 못했기에 굶주림을 견뎌야 했습니다. 날이 저물면 젊은 아버지들이 목숨을 걸고 바깥 마을로 내려가 보리쌀이나 조 등을 구해왔습니다. 가져온 곡식을 맷돌에 갈아 헝겊으로 걸러 죽을 쑤면 모두가 손을 모아 조금씩 떠먹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굶주림과 공포를 버티며 두 달 남짓을 지냈습니다. 홍춘호 할머니는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먹을 것도 하나도 못 챙겨 왔다. 아버지들이 해 지면 밖으로 나가 조를 구해 와 맷돌에 갈아 범벅(죽)을 만들어 먹었다.”

어느 날은 같이 동굴로 피신하지 못하고 산으로 흩어졌던 동생들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너무나 두렵고 끔찍했던 나머지, 홍 할머니는 고향 무등이왓과 큰넓궤를 그 후로 수십 년간 한 번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살아남았지만, 고향 땅을 다시 밟는 것조차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 증언은 4·3이 개인의 삶에 남긴 깊은 정신적 상처와 그로 인해 이어진 오랜 침묵의 세월을 보여줍니다.

 

피난민들이 숨죽이며 지냈던 큰넓궤에도 결국 토벌대의 마수가 뻗쳤습니다. 1949년 1월 초 어느 날, 토벌대가 굴 근처까지 수색을 벌이자 주민들은 더 이상 동굴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짐짓 아무 일 없는 듯 굴을 빠져나와 눈 덮인 한라산 자락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허기와 추위에 지친 데다 어린아이와 노약자까지 섞여 속수무책이었던 그들은 산중에서 금세 붙잡히거나 토벌대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큰넓궤를 빠져나온 주민들 중 일부는 한라산 영실 지역 볼레오름 부근에서 토벌대와 맞닥뜨려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고, 나머지는 서귀포로 끌려가 정방폭포 등의 학살지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국 큰넓궤에서 간신히 이어온 목숨줄은 정방폭포의 피비린내 속에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동광리 주민 약 40여 명이 이렇게 희생되었고, 동굴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큰넓궤는 단순한 자연동굴이 아니라,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삶을 부지하려 애썼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동시에 그곳에서의 경험과 이후 펼쳐진 학살은 생존자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긴 세월 함구증에 시달리던 생존자들이 이제 하나둘 입을 열어 증언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신원숙 할머니의 증언처럼 “아직도 그때를 기억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는 공포는, 말 못 할 한(恨)이 되어 가슴 깊이 파묻혀 있었습니다. 고완순 할머니(증언 당시 85세, 북촌리 학살 생존자)는 두 살배기 동생이 군인의 손에 참혹하게 죽어가는 광경을 지켜본 죄책감에 평생 시달렸습니다. “동생이 나 때문에 죽었어...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아 4·3 얘기하는 것이 정말 싫어. 어쩌겠어, 기억하는 사람이 몇 안 남았는데.” 그녀는 결국 70년이 지나 그림 치료를 받으며 응어리를 조금씩 풀어가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의 이러한 목소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트라우마를 딛고 진실을 밝히려는 현재의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이 용기가 쌓여 비로소 제주 4·3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2.4 시신 없는 무덤들: 임문숙 가족 헛묘와 김여수 가족 헛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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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숙 가족 헛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8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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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월 정방폭포 학살에서 가족을 잃은 동광리 유족들은 사랑하는 이의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하는 절망을 겪었습니다. 바다로 떠내려간 시신, 또는 여러 시신이 겹쳐 엉킨 참혹한 현장은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고, 총칼로 가족을 잃은 것도 모자라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는 한을 남겼습니다. 이에 살아남은 가족들은 맨손으로 시신 일부를 추려 헛묘(虛墓)를 만들어 혼이라도 달래기로 했습니다.

동광리 마을 어귀에는 그렇게 만들어진 헛묘가 두 곳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임문숙 가족 헛묘입니다. 동광리 출신 임문숙 씨는 정방폭포 학살로 남편과 자식 등 일가족 9명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학살 현장에 달려갔지만 시신을 찾을 수 없었던 임 씨와 유족들은 결국 혼백만이라도 모셔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임문숙 씨의 증언에 따르면, “칠성판을 미리 짜고 학살 터였던 정방폭포 위로 갔습니다. 가서 보니 뼈들이 다 엉켜 있어서 도저히 누구 시신인지 알 수가 없었지요. ... 결국 시신은 못 찾았지만 죽은 이들의 혼을 불러다 헛봉분을 쌓고 묘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임문숙 가족 헛묘는 9명의 혼을 7기의 봉분으로 모신 것입니다(2기는 합장).

 

또 한 곳은 김여수 가족 헛묘입니다.

큰넓궤에 숨어 지내다 피신한 뒤 학살당한 김여수 씨 일가 5명의 영혼을 모신 무덤입니다. 김여수 씨 가족 역시 시신을 찾지 못하자, 살아남은 친척들이 그의 생전 옷가지 등을 넣어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돈이 없던 집은 비석만 세워 놓고 명복을 빌었고, 좀 형편이 나은 집은 무당을 불러 망혼을 불러오는 의식을 치른 뒤 봉분을 만들어 제를 올렸습니다. 제주에서는 이러한 무덤을 헛묘라 불렀습니다. 말 그대로 시신 없는 무덤입니다.

헛묘의 존재는 국가폭력이 민간인에게 가한 비인도적 만행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사람을 이유 없이 죽인 것도 모자라, 죽은 자를 보내는 마지막 예의조차 짓밟은 것입니다. 가족들은 시신 한 조각 얻지 못한 채 울부짖으며 빈 무덤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시신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부재를 넘어서, 희생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남은 이들에게 이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한(恨)으로 남았습니다.

헛묘에 돌을 얹으며 유족들이 흘린 피눈물은 4·3의 비극이 단순한 인명 피해를 넘어, 한 마을 공동체의 정신적·문화적 기반을 얼마나 철저히 파괴했는지를 웅변합니다.

 

세월이 흘러 나라에서 명예 회복을 말하고 보상을 운운하지만, 정작 희생자와 유족들의 한은 지금도 다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앞서 언급한 윤옥화 할머니의 사례입니다. 윤 할머니는 북촌리 학살 때 일가족을 잃은 뒤 겨우 목숨을 부지했지만, 부모님이 4·3 당시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법적으로는 고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큰아버지 댁 호적에 입적된 탓에, 친부모를 잃었는데도 법적으로는 유족이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정부에서 4·3 유족이라 인정해주는 기준은 호적 등 행정서류상의 관계뿐이어서, 결국 윤 할머니는 아직까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부모가 혼인신고를 못하고 돌아가신 게 내 탓인가요. 내가 가족을 잃었는데 유족이 아니라니...”라며 눈물을 떨구는 그녀의 모습은, 국가의 형식적인 행정이 얼마나 또 다른 상처와 소외를 낳고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제주 4·3은 이렇게 끝나지 않은 역사입니다.


제3부: 대정읍, 남은 상흔과 끝나지 않은 진실 🏜️

3.1 일제강점기 유적: 송악산 진지동굴과 알뜨르 비행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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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알오름 주차장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16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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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다크투어 여정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다음 장소는 일제강점기의 상흔이 어린 송악산 일대입니다.

용머리처럼 바다로 돌출한 송악산 중턱에는 일제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구축한 수많은 해안 진지 동굴들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또한 그 아래 평지에는 일제가 2차대전 중 건설한 군용 비행장인 알뜨르 비행장의 넓은 활주로 자리가 펼쳐져 있습니다. 송악산과 알뜨르 비행장은 일본 제국주의가 제주도를 침략전쟁의 마지막 보루로 삼고자 했던 야욕과, 그로 인한 제주도민의 강제노역과 고통을 증언하는 장소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제주 청년들이 일제에 끌려와 송악산 갱도와 비행장 건설 현장에서 삽과 곡괭이를 잡아야 했고, 총칼 아래 죽도록 부려지다 쓰러져 간 이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제주도민들은 일제의 폭압에서 벗어나는 듯했습니다. 일제가 패주하며 송악산 진지동굴 속에는 미처 쏟아붓지 못한 포탄과 탄약만이 남았습니다. 알뜨르 비행장에도 이제는 비행기가 아닌 망아지들이 어슬렁거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해방은 오지 않았습니다. 일본인의 뒤를 이어 제주에 들어온 것은 미국 군정이었습니다. 일제 통치에서 막 벗어난 제주도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주독립과 통일을 이루길 염원했지만, 그런 꿈은 미소 냉전의 논리에 짓눌리고 말았습니다. 미군정은 친일 경찰을 다시 등용하고, 제주에 주둔하며 치안을 장악했습니다. 제주 섬은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의 군사 요충지로, 해방 후에는 미군정 아래 냉전의 전초기지로 강대국들의 전략적 이해에 휘둘리는 섬이 되고 만 것입니다. 송악산 동굴진지와 알뜨르 비행장은 이러한 역사적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에메랄드빛 바다와 이국적인 풍광에 감탄하지만, 그 눈부신 풍경 이면에는 제국주의와 냉전이 낳은 비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반도 최남단의 섬 제주가 어떻게 세계사적 격변 속에서 끊임없이 희생되어 왔는지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이 장소들입니다. 일제의 총칼 아래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제주 민초들의 원혼과, 미군정 치하에서 또다시 외세와 권력의 폭압에 좌절해야 했던 제주도민의 한이 서린 곳—송악산과 알뜨르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과연 이 땅에 진정한 해방은 있었는가.”

3.2 섯알오름 탄약고 학살지: 한국전쟁과 예비검속의 비극 💣

대정읍 섯알오름은 겉보기엔 평범한 오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자락에는 일본군이 남긴 콘크리트 탄약고 터가 있고, 그 앞에 4·3의 또 다른 비극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제주도에서 자행된 예비검속 학살의 대표적 현장입니다. 예비검속이란 전시 상황에 대비해 평소 요시찰 인물이나 전과자, 좌익으로 지목된 인물들을 미리 검거해 두는 조치를 말합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와 군 당국은 전국적으로 예비검속을 실시했고, 제주도에서도 4·3 당시 ‘좌익’으로 분류되었던 주민들이 대거 체포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잡아 가둔 주민들을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 처형했다는 점입니다.

제주도에 주둔하던 계엄군과 경찰은 모슬포를 중심으로 서귀포 서부 지역 예비검속자들을 모아 놓고, 7월 말부터 8월 하순 사이 여러 차례에 걸쳐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섯알오름 인근 옛 일본군 탄약고 터는 그중 한 곳으로, 특히 8월 20일 새벽(음력 7월 7일)에는 하루에 190여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이곳에서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주민들은 전날 밤 트럭에 실려 이곳으로 끌려왔는데,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직감했다고 합니다. 일부는 트럭에서 가족에게 마지막 흔적을 알리려 신발이나 소지품을 도로에 내던졌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유족들이 그 길을 수색했을 때 검정 고무신 한 짝과 찢어진 옷가지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나 여기서 죽었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이들은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섯알오름 탄약고 앞에서, 총성이 울리고 비명이 터졌습니다. 타타타타- 기관총이 불을 뿜었고, 쓰러지는 사람 위로 또 사람이 쓰러졌습니다. 현장에 함께 끌려갔던 윤옥화 씨(당시 7세)는 그날의 지옥도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군인들이 총으로 사람들을 타타타타- 쏘았어요. 한 군인은 죽은 사람의 팔을 잡고 사지(四肢)를 내동댕이치기도 했어요. ... 우린 총알 안 맞으려고 돼지처럼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기었어요. 그러다 제 손에 뭐가 탁 걸리더군요. 살살 더듬어 보니, 아기가 죽은 엄마 배 위에서 젖을 물려고 하고 있었어요...”* 총탄 세례에 부모 형제가 쓰러지고, 심지어 엄마 품에 안긴 채 젖을 찾던 갓난아기까지 시신 더미 위에서 숨이 끊어진 참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증언입니다.

 

이렇듯 섯알오름에서 벌어진 예비검속 학살은 제주 4·3의 또 다른 절정의 비극이라 할 만합니다. 4·3 당시에도 많은 양민 학살이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자 국가 폭력은 더 폭주하여 모든 ‘빨갱이’로 지목된 사람들을 절멸시키려 들었습니다. 군·경은 심지어 젖먹이 아기까지 빨갱이 새끼로 취급하며 죽이는 광기를 보였습니다. 섯알오름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이는 훗날 증언을 남기며 “거기서 죽은 사람들은 군경 가족을 빼고는 죄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예비검속으로 끌려간 사람 중에는 그냥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혹은 4·3 때 형이나 부모가 희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잡힌 이들이 많았습니다. 일단 ‘빨갱이’로 낙인 찍히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시절이었습니다.

 

섯알오름 탄약고 학살지에는 이렇게 희생된 이들의 신원이 뒤섞여 백조일손지묘라는 공동묘지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다음 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섯알오름 학살이 제주 4·3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점입니다. 4·3 당시 무장대에 가담했거나 연루되었다고 의심받은 사람들, 혹은 그 가족까지 전쟁 통에 모조리 제거해 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국가가 국민을 공포 통치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며, 학술적으로도 *집단학살(genocide)*의 한 사례로 인정됩니다. 제주 4·3은 이렇게 한국전쟁 초기의 민간인 학살과도 맞물려 있으며, 냉전이라는 거대한 폭력 구조 속에서 하나의 지역 사건이 아니라 세계사적 비극의 일부로 확장되었던 것입니다.

현재 섯알오름 탄약고 학살 현장은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예비검속 학살터로서, 국가 차원의 기념관과 교육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음습한 콘크리트 탄약고 벽에는 총알 자국이 남아 있고, 그 앞에는 당시 희생자들이 죽음을 예감하며 던졌다는 검정 고무신과 찢어진 손수건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처연한 유품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3.3 백조일손지묘: 뒤엉킨 죽음, 하나 된 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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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일손지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5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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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는 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로 희생된 수백 명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자, 유족들이 합심하여 만든 공동묘역입니다.

‘백 가지 성씨의 조상들이 하나의 자손이 되었다’는 뜻으로, 여러 성씨 희생자의 유골을 한데 모셨다는 의미입니다.

4·3 당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절망 속에서도, 결코 그들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로 이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곳곳에 흩어진 유골들을 수습해 한 자리에 합장했고, 커다란 비석을 세워 그 사연을 새겼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아들의 유품이 나온 곳을 가리키며 맨땅을 파헤쳐 한 줌 흙을 퍼 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이를 보내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백조일손지묘는 단순한 묘지가 아니라, 공동체의 슬픔과 연대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국가 폭력이 개인의 존재를 말살하려 했을 때, 남은 자들은 끝까지 기억과 애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내 가족의 뼈가 섞여 누구 것이 누구 것인지 알 수 없어도, 우리는 이들을 한 곳에 모셔 우리 모두의 조상으로 받들겠다는 것이 백조일손지묘의 의미입니다. 이곳에는 132위 이상 희생자의 넋이 하나로 모셔져 있습니다. 원혼들을 기리는 비석에는 “132명이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죽어 한데 엉기었으니 차라리 모두가 한 집안의 자손이다”라는 취지의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유족들은 핏줄과 성씨를 넘어 공동의 아픔을 함께 짊어졌고, 서로를 의지하며 오늘날까지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 싸워왔습니다.

백조일손지묘 옆에는 작은 역사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역사관에는 예비검속 학살의 전말과 희생자들의 삶, 그리고 유족들의 증언과 노력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탄약고 모형 한편에는 당시 희생자들이 남긴 검정고무신과 가족 사진, 누렇게 바랜 편지 조각 등이 놓여 관람객들을 숙연하게 합니다. 백조일손지묘는 4·3이 남긴 상흔을 기억의 힘으로 치유하고자 하는 제주 공동체의 노력이 맺은 결실입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한이 많지만, 유족들은 말합니다. “이제라도 이렇게 이름을 불러주고 넋을 달래드리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고. 백조일손지묘는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되 증오로 남겨두지 않고, 화해와 평화의 미래로 승화시키려는 제주도민들의 굳은 다짐을 보여주는 산 증거입니다.


제4부: 정방폭포, 마지막 학살의 현장 🌊

서귀포의 명소 정방폭포는 폭포 물줄기가 바로 바다로 떨어지는 천혜의 관광지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제주 4·3의 맥락에서 정방폭포는 아름다운 풍경 뒤에 끔찍한 비극을 감추고 있는 마지막 학살지이기도 합니다. 1949년 1월, 동광리 큰넓궤 등에서 붙잡힌 주민 약 40여 명은 서귀포 경찰 주재소로 끌려왔습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포함된 이들은 며칠 간 옥에 갇혀 있다가, 어느 흐린 겨울날 정방폭포 절벽 위로 내몰렸습니다. 군인과 경찰은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고, 한 명씩 절벽 아래로 쏘아 떨어뜨렸습니다.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와 함께 총성이 울려퍼졌고, 포구 아래 바닷물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습니다. 죄목도, 재판도 없었습니다. “토벌 작전 중 검거된 무장반란 관련자 처단”이라는 구두 명령만 있었을 뿐입니다. 두 달 넘게 동굴 속에서 목숨을 부지했던 주민들은 그렇게 마지막에 가서 한낱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정방폭포 학살의 잔혹함은 시신 처리 방식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총살당한 희생자들의 시신은 그대로 높이 23미터 절벽 아래로 툭툭 밀쳐 떨어뜨렸습니다. 겨울 바다는 차디찼고, 시신들은 포구의 검은 현무암 바위에 부딪혀 형체를 알 수 없게 훼손되거나 파도에 휩쓸려 심연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유족들이 달려왔지만, 바다에 떠내려간 시신을 찾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가까스로 폭포 주변에서 수습한 시신 몇 구도 머리와 팔다리가 따로 발견될 정도로 참혹한 상태였고, 많은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임문숙 가족처럼 온 가족이 학살된 경우, 누구의 뼈인지조차 몰라 모두 한데 모아 향을 사르고 눈물로 혼을 불러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방폭포는 이렇게 국가권력이 자국민을 학살하고 그 흔적마저 지우려 한 현장입니다. 오늘날 정방폭포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승지입니다. 떨어지는 물줄기 뒤편에 이렇듯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은 모른 채 지나칩니다. 그러나 이 곳에 서면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폭포 소리 사이로 들리는 듯한 비명과 통곡을. 정방폭포의 장쾌한 물안개 속에는, 아직 가족의 품에 안기지 못한 영령들의 원혼이 맴도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폭포가 한때 피로 물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연조차 학살의 도구로 삼았던 그 시대의 광기를, 우리가 잊지 말아야만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입니다. 정방폭포를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는 작은 위령 표지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씌여 있습니다. “이곳은 제주4·3사건 당시 양민 학살지입니다. 죄 없는 주민들이 희생된 아픈 역사를 기억합시다.”


결론: 끝나지 않은 역사, 이제 시작이다 🌅

제주 4·3은 과거의 비극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수많은 무고한 제주도민의 피눈물과 절규가 서린 이 땅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 70여 년 동안 묻혀 있던 진실이 어렵게 세상에 드러났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피해자들의 상처는 다 아물지 않았으며, 진정한 정의와 명예회복은 여전히 요원하다.

 

특히, 최근 우리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역사적 사건을 마주했다.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내란세력이 자행하려던 불법 친위쿠데타 시도는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제2의 제주 4·3이 될 수도 있었던 이 위험천만한 사태는 다행히 시민들의 깨어 있는 정신과 민주적 저항으로 저지되었으나, 이는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위험임을 경고하고 있다.

 

다행히 내란세력의 종식을 희망하는 국민들의 염원으로 이재명 정부가 들어섰지만, 이것이 모든 문제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시작점에 선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지난 70여 년 동안 쌓이고 쌓인 모순과 부패, 변태적인 정치·사회·경제 구조로 인해 뼛속까지 썩어버렸다. 이 나라의 환부를 도려내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극단적으로 말해 앞으로 5년 내내 특별검사를 진행해도 부족할 정도이다.

 

이 모든 혼란과 비극의 근본에는 해방 이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친일 청산의 문제, 그리고 미국의 끊임없는 내정간섭과 한반도 분단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키고, 끊임없이 남북 간 반목과 반북 이념을 조장하며 한반도를 자신들의 군사적 전략 거점으로 이용했다. 제주 4·3의 학살 책임 또한 미군정의 작전통제권 아래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미국은 결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제주 4·3 학살 당시 미군은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공범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규명해야 한다.

 

제주 4·3의 아픔과 분노는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일깨우는 중요한 거울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물며 역사를 왜곡하는 나라에 희망이 있을 리 없다. 이제야말로 친일의 잔재와 미국의 내정간섭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모순을 직시하고, 철저한 자기 성찰과 근본적인 개혁을 통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제 우리는 비극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다시는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제주 4·3의 진실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은 단순한 역사 바로잡기를 넘어, 우리 모두의 미래를 지키는 중대한 의무이자 시작이다. 제주 4·3이 남긴 진실과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고, 오늘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내일의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에 함께 동참하자. 그것이야말로 제주 4·3의 영령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마지막 소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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